제목은 현재 브금. 언젯적 노래인지 가물레이션한 동경사변의 신쥬네가이.
키카사입니다. 얀 요소 있음. 샼님의 신박한 멘션을 바탕으로(?) 작성.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에서 가장 위험한 건 집착하는 거래.
강의실에서 여학생들끼리 얘기하던 중 그 한 대목이 카사마츠의 귀에 들어왔다. 오늘 강의분의 프린트를 넘기던 손이 멎었다.
"그치만 그만큼 좋아해 준다는 소리잖아."
"뭐, 그것도 있겠지만 집착이 심하면 서로 망가질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마치 해 본 것 처럼 얘기하네."
까르륵, 하고 여학생들의 무리에서 웃음이 터져나왔지만 카사마츠는 전혀 웃을수가 없었다. 서로가 망가지는 관계, 그 말이 이상할 정도로 귓가에서 맴돌았다. 카사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강의실을 나왔다. 강의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음료수 자판기 앞에 서서 지갑을 연 카사마츠의 시야에 지갑 한 쪽에 끼워져 있는 사진이 들어왔다.
- 선배, 스티커 사진 찍어요.
- 미쳤냐? 남자 둘이 무슨.
- 에이, 왜요. 저랑 찍고 싶다고 줄 서는 애들이 한 둘이 아닌데 그거 다 걷어차고 선배랑 찍겠다는데!!
- 그럼 걔들이랑 찍던가!! 야, 잡아 당기지 마!!
반 년 전, 센터 시험을 끝내고 나오던 길에 마주친 키세에게 끌려가 찍었던 사진이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후배 녀석이었다. 그리고 그건 카사마츠 본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졸업을 앞두고 답지않게 머뭇거리며 키세가 '좋아해요, 선배.'라고 했던 그 순간에 느낀 감정에 희미한 우월감 같은 게 섞여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후배 녀석이 선택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한 우월감.
그리고 그 우월감은 곧 목줄처럼 카사마츠의 목을 서서히 조여왔다.
카사마츠는 딱히 자존감이 낮은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자신감이 있는 편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성격이었다. 제게 돌아오는 모든 결과는 자신의 행동과 노력에 비례하는 것이라고 믿어왔고, 그렇기에 제 앞에 나타난 결과가 좋더라고 하더라도 결코 자만하지도 불안해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키세만은 예외였다. 키세 료타를 손에 넣기 위해 카사마츠 유키오가 한 '노력'은 없었다. 팀 메이트이자 에이스인 후배를 팀에 녹아들게 하기 위한 노력은 했을지언정, 그가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라며 한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세는 카사마츠의 손에 들어왔다. 별다른 노력 없이 제 손에 들어온 그는 남들이 손에 넣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을 상대였을텐데. 시작은 그들에 대한 약간의 우월감이었지만, 곧 그 우월감은 불안으로 돌아왔다. 노력 없이 손에 넣은 것은 쉽사리 그 손에서 빠져나가리라는 불안감이 카사마츠의 목을 천천히 조여들었다.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사마츠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곤 지폐를 꺼내고는 지갑을 닫았다. 지금쯤 키세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으리라. 체육 시간이라면 아마 운동장에 나와 있을 다른 학년, 다른 반 여학생들을 무던히도 설레게 하고 있겠지.
딱 한 번, 키세의 반이 체육 수업을 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늘 코트에서 보던 녀석의 운동하는 모습이라 별 감흥이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게 얼마나 오산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번 보면 뭐든 할 수 있어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이 농구 이외에도 적용되고, 심지어 그게 수준급이라니. 신은 얼마나 불공평한건지. 담담한 표정으로 리프팅을 하는 키세의 머리카락이 햇빛 아래에서 눈부실 정도로 반짝였던 게 떠올랐다. 톡톡,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축구공을 차올리는 무릎이며 발끝이 그리는 흰 선에 얕은 한숨이 새어나올 뻔 한 것을 삼켰던 기억도. 순수한 부러움과 뒤섞였던 감정은 분명 어렴풋한 연심이었다. 아마 그 자리에서 키세를 보고 있었을 다수의 여학생들이 느꼈을 것과 흡사한 그런 감정.
덜컹, 하고 자판기에서 캔음료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에 카사마츠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음료수를 꺼내선 강의실로 돌아갔다.
노력 없이 손에 들어온 상대였기에 금방 손에서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 지는 게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매일 대여섯통은 꼬박꼬박 보내던 키세의 메일이 이틀에 한 두번 정도로 확 줄어든 그 때 부터 였는지도 몰랐다.
***
다음날이 오프라며 카사마츠의 자취방에 들이닥친 키세와 저녁을 먹고, 생각난 김에 키세의 공부를 조금 봐주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열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전철 끊기는 거 아니냐?"
"오늘 선배 방에서 자고 갈래요."
아예 침대에 엎드려서 농구 잡지를 뒤적이는 키세를 보며 카사마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키세는 그 한숨 소리에 고개를 들어 카사마츠를 올려다 보았다가, 곧 웃었다. 그리곤 침대에서 일어나선 카사마츠의 앞에 선 키세는 몸을 가볍게 숙이며 웃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한 거리. 키세가 내쉬는 숨결이 카사마츠의 뺨이며 입술을 간질였다.
"괜찮죠?"
".... 안된다고 해도 죽치고 있을 거잖냐."
"당연하죠."
키세는 목안으로 웃으며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는 마치 강아지가 주인의 입술을 핥듯 카사마츠의 입술을 낼름, 핥으며 웃었다. 선배, 좋아해요. 그 한 마디가 그 날따라 이상할 정도로 거짓말 같이 들렸다. 다시 한 번, 묵직한 무언가가 카사마츠의 가슴을 짓눌렀다. 좋아한다는 키세의 말에 대한 대답은 그 날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제 입술을 핥는 키세의 뺨을 감싸쥐고, 여전히 서투르게 입술을 겹쳤을 뿐이었다.
집착이 심하면 서로 망가질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그 한 마디가 다시 한 번 머릿 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카사마츠는 생각했다. 아마 난 이 녀석에게 집착하고 있는지도 몰라. 아니, 아마가 아니고 확실히. 등이 바닥에 닿는 감촉, 목덜미를 간질이는 키세의 머리카락이며 숨결에 머릿속이 희뿌옇게 변해가면서도 카사마츠는 확신했다. 이 녀석이 내 손에서 빠져 나갈 것 같은 때가 오면, 아마 난 이 녀석을 망가뜨릴지도 모른다고. 이 녀석이 곁에 없게 될지도 모르는 그 순간이 오면, 아마도 같이 부서져 버리는 길을 택할지도 모른다고. '선배, 무슨 생각 해요?' 라고, 키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카사마츠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키세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살짝 누르며 쓸어내렸다.
열기가 가신 이후, 제 곁에서 새근거리며 잠든 키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사마츠는 가볍게 키세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떼었다. 언젠가 키세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 신쥬(心中)가 뭡니까? 마음 속요?
- .... 넌 대체 아는게 뭐냐?
- 농구요. ... 어, 선배 방금 저 엄청난 말을 들은 기분인데요?
- 알면 됐다.
연인이 자신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함께 자살하는 것이라고 알려줬을 때, 키세는 '헤에....' 하며 눈가를 좁혔었다. 왜 같이 죽는데요? 글쎄다, 마음이 변할까봐? 자기 마음이요, 아니면 상대방 마음이요? 내가 알게 뭐냐, 아마 둘 다겠지. 거기까지 대답했을 때 키세는 대답 대신 그저 입술 끝만을 가볍게 비틀었을 뿐이었다.
- 마음이 변하는 게 두려워서 죽이는 거네요, 결국.
한참 뒤에야 툭, 하고 내뱉은 키세의 말이 지금의 카사마츠에겐 이상할 정도로 와 닿았다.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새근거리며 잠든 키세를 가만히 내려다 보던 카사마츠의 손이 키세의 뺨을 쓰다듬었다. 뺨에서 턱으로, 그리고 턱에서 목덜미로. 매끈하게 이어지는 그 선을 천천히 따라 내려오던 카사마츠의 손이 키세의 목을 짚었다. 한 손이 먼저 목을 감싸쥐고, 미처 다 감싸쥐지 못한 부분을 다른 손이 자연스레 감싸쥐었다. 그저 그렇게 감싸쥐고만 있던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난 네 마음이 변하는 게 두려운 걸지도 몰라.
키세의 목에 얕게 카사마츠의 손이 파고들었다. 그걸 바라보던 카사마츠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한 번 흔들렸다. 그리고 처음 목을 쥐었던 때처럼 천천히, 힘겹게 손이 떨어졌다. 숨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네가 좋아, 그래서 무서워. 목에 걸린 말은 기어코 목소리가 되어 나오진 않았다. 목에 희미하게 남은 자국을 바라보던 카사마츠는 키세에게서 등을 돌리고 누웠다. 바라보고 있기가 두려웠다. 보고 있다간 제 손으로 다시 한 번 키세의 목을 조르고 말 것만 같아서. 카사마츠는 눈을 꾹 감고 애써 흐트러진 숨을 가다듬으며 잠을 청했다. 몸의 피로와 마음의 피로가 동시에 밀려들며 잠이 밀려들었다.
불빛이라곤 밖에서 새어드는 가로등 불빛 뿐인 방에서 키세는 제 목을 쓰다듬었다. 카사마츠의 손이 지긋이 누르던 감각이 선연했다. 키세는 몇 번이고 그 손자국을 쓰다듬으며 입술 끝만을 올려 웃었다.
그러니까 누가 나쁜 놈인가. 누가 선배를 이렇게 만들었냐면 키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