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마무리를 지어야지....... 이걸 일케 쓸 줄은 몰랐는데. 응.
키세와의 행위는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카사마츠는 그 이외의 어떤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지독했다. 끔찍할 정도였다. 아무것도 넘기지 않는 저항도 손쉽게 꺾였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수십번 들었지만 키세는 결코 카사마츠를 자유롭게 해 주지 않았다. 선배가 죽는 건 싫어요. 강제로 카사마츠에게 무언가를 먹이면서 키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서는 마치 자연스러운 순서인 양 카사마츠의 몸 이곳 저곳에 입술을 가져갔다.
빛을 제대로 본 시간이 극도로 짧아진 눈은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 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키세는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카사마츠가 치를 떠는 것도 개의치 않고 닿을 때 마다 건조한 숨결도 같이 닿았으니까, 분명 숨은 쉬고 있었다. 그러나 '선배.'라며 찾는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건조했다. 카사마츠의 귓가에 겨우 닿아 바스러 지는 것 처럼 흐릿하고 탁했다. 그런 목소리로 키세는 카사마츠를 찾았다. 선배, 카사마츠 선배, 좋아해요. 그 말 외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기절하듯 잠들었다 깨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변화는 순식간에 찾아들었다.
카사마츠가 인기척에 눈을 떴을 때, 키세가 침대 곁을 지나치다가 걸음을 멈추곤 카사마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약하게 웃었다.
"깨셨어요, 선배?"
그 목소리에 카사마츠는 저도 모르게 흠칫, 하고 몸을 굳혔다. 그 반응을 보고 키세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아주 잠깐, 그대로 멈춰선 채 카사마츠를 보던 키세는 언제나처럼 닿아오는 대신 커튼이 굳게 닫혀있는 창가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지금 몇 시인지 아시겠어요?"
카사마츠는 대답하지 않은 채 어둠 속에 희게 떠오른 키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복장이 낯익었다. 카사마츠는 기억을 더듬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깨닫곤 가늘게 몸을 떨었다. 처음 카사마츠가 이 방에 오던 그 날, 키세가 입고 있던 그 옷이었다. 제 피가 엉망으로 묻어있던. 키세는 돌아보지 않은 채 커튼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커튼을 열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가로등의 불빛마저도 눈이 부셨다. 그제야 카사마츠는 자신이 얼마나 빛을 보지 않았는지를 절감했다. 키세는 한참동안 창가에 서서 바깥을 말끄러미 내다 보고 있었다.
"오늘 며칠인지 아세요?"
알 리가 없었다. 카사마츠의 시간 감각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저 기억 나는 건 키세와 만나기로 했던 게 12월 중순에 가까운 초였다는 정도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던 걸까. 얼마나 오랫동안 키세에게 휘둘린 걸까. 앞으로 얼마나 더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걸까. 앞으로 얼마나 더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며 휘둘려야 하는 걸까. 아마도 키세가 질릴 때 까지일까. 카사마츠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마치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키세가 카사마츠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카사마츠는 처음으로 제 눈 앞의 후배에게서 공포를 느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키세를 좋아했다. 제 앞에서 강한 척은 다 하지만 얼마나 약한지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딱 일 년. 키세와 제대로 무언가를 공유한 건 고작해야 일 년이었지만 그를 알기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사마츠는 처음으로 그게 오산이라고 생각했다. 키세는 카사마츠가 생각하는 것 보다도 훨씬 복잡한 사람이었다. 코트 위에서의 키세가 지나칠 정도로 단순했던 것 뿐이었다. 카사마츠는 그 단순한 면만을 알고 있었던 것 뿐이었고, 그것만을 보고 키세를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뿐이었다. 오한이 밀려들었다. 키세는 가만히 카사마츠를 바라보다가 창을 열었다. 차가운 12월의 바람과 함께 바깥의 소리가 한번에 밀려들었다. 멀찍이서 들리는 경적소리. 아마도 옆집에서 틀어놓은 것 같은 티비 소리. 카사마츠는 키세가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건지 몰랐다. 지금까지 외부와 격리시켜 놓았던 건 언제고, 이제와서 제 앞에 흘러가는 시간을 들이대는 후배의 행동을 알 수가 없었다. 키세는 창가를 등진 채 카사마츠를 돌아보았다. 빛을 등진 키세의 표정은 금세 빛에 익숙해진 카사마츠의 눈에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한 걸음, 키세가 카사마츠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카사마츠의 손목에 오랫동안 채워져 있던 수갑의 줄을 확 잡아 챘다. 찰캉이는 금속음과 함께 양 손목에 가벼운 아픔이 밀려들었다. 키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카사마츠를 침대 밖으로 끌어냈다. 지면에 발이 닿는 순간, 카사마츠는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땅에 발을 딛지 않았는지를 절감했다. 차가운 바닥이 생소했다. 발목에 채워진 사슬이 한 걸음을 뗄 떼마다 소리를 냈다.
"너, 또 뭘 하려는 거야."
"글쎄요. 선배랑 오늘을 '축하'하려고요."
오늘 무슨 날인지 모르시겠어요? 여전히 건조한 목소리로 키세가 그렇게 물었다. 카사마츠는 '내가 알 리가 있냐.'라고 씹어뱉듯 답했고, 키세는 그 대답에 웃었다. 그러게요, 알 리가 없네요, 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키세는 카사마츠를 창가로 데려갔다. 방충망까지 열려있는 창 밖은 자칫 몸을 잘못 내밀었다간 사람 하나 쯤은 가볍게 떨어지고도 남았다. 키세의 방은 10층 맨션의 4층. 떨어지면 크게 다치던가,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는 높이였다.
그리고 키세는 그 창가를 등지게 한 채로 카사마츠를 세웠다. 소름이 돋았다.
"걱정 마요. 이게 있으니까 떨어지진 않을 거예요."
키세는 그렇게 말하며 카사마츠의 발목에 연결되어 있는 사슬을 발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우습죠? 선배의 자유를 빼앗은 게 지금은 선배의 생명줄이잖아요. 키세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카사마츠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키세의 손이 카사마츠의 눈가며 뺨을 천천히 쓸었다. 뺨에 닿는 키세의 손 끝이 차가웠다. 마치 피가 돌지 않는 것 마냥. 키세가 몸을 약간 숙여 카사마츠의 귓가에 속삭였다. 선배, 들려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려주는 소리요. 하지만 카사마츠에게 들리는 소리라곤 바람 소리와 차 소리, 아득하게 들려오는 생활음과 키세의 숨소리밖에 없었다.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키세가 웃었다. 안 들리나 보네요. 키세가 가볍게 카사마츠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가 떼었다. 닿은 키세의 입술이 까슬했다.
"그럼 알려 드릴게요. 오늘 24일이에요. 크리스마스 이브요."
키세의 손이 카사마츠의 뺨에서 목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긴장에 뻣뻣하게 굳은 목선을 마치 달래듯 쓰다듬으며 단조로운 목소리로 키세가 속삭였다.
"축하 할 날이잖아요. 물론 전 크리스천도 아니니까 아무 감흥도 없지만, 평범한 연인들은 이 날을 축하하면서 같이 시간을 보낸다면서요? 작년엔 선배랑 저도 그럴 예정이었는데, 제 촬영 일정이 늦춰져서 같이 못 보냈으니까요. 이번 해엔 같이 보내고 싶었어요."
목선을 덧그리듯 쓰다듬던 키세의 손이 카사마츠의 쇄골을 더듬었다. 수갑의 줄을 잡고 있던 것을 놓고, 키세는 다른 한 손으로 카사마츠의 뺨을 쓰다듬다가, 뒷목으로 손을 옮겼다. 간질이듯 느긋하게 목선을 쓸어올리던 손이 카사마츠의 머리카락 안으로 파고 들었다가, 그대로 잡아 채듯 고개를 젖히게 만들었다. 큽, 하고 짧게 숨을 들이쉬자 키세가 물었다. 미안해요, 아팠어요? 카사마츠는 눈동자만을 움직여 키세를 보려 했지만 한껏 젖혀진 시야 안에 키세를 담는 일은 불가능했다. 노란 가로등과 멀찍이 보이는 네온 싸인 불빛이 눈에 시렸다. 목가에 키세의 숨이 닿았다.
"이번 해에도, 다음 해에도. 그리고 그 다음 해에도 계속 같이 보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무리죠? 키세의 그 말은 질문이라기 보다는 확신이었다. 짤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사마츠는 키세가 뭘 하는지 몰랐다. 머리에 피가 몰려 어지러웠다. 한참동안 들려오던 소리가 멎은 다음, 카사마츠의 귓가에 무언가 금속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위화감이 밀려왔지만, 잠시동안 카사마츠는 그 위화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선배는 이제 제 옆에 있으려고 하지 않을 거고."
한동안 느껴지지 않던 키세의 손 끝이 다시 닿아왔다. 옷 위로 카사마츠의 몸을 더듬어 올라오는 손은 여지껏과 다르게 집요하지도, 끈적하지도 않았다. 그저 닿는 듯, 닿지 않는 듯 흔적조차 남기려 하지 않고 쓸어 올라오는 손이 생소했다. 서늘한 손 끝이 다시 한 번 카사마츠의 목까지 올라왔다.
"저도 선배 옆에 있을 수 있을 거란 생각 같은 건, 이젠 안해요. 그러니까, 하나만 남기게 해 줘요."
뭘, 이라고 반문하려는 순간 키세의 손이 카사마츠의 목을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지그시 목을 눌렀다.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고, 카사마츠의 몸이 반쯤 창 너머로 넘어갈 때까지. 숨이 막혀 눈 앞이 희뿌옇게 변할 때 쯤, 목을 누르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거칠게 숨을 몇 번 들이쉬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키세는 카사마츠의 목을 눌렀다.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아득해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의식 속에서 키세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사마츠는 키세의 손을 떼어내려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제 목을 누르고 있는 손은 이제 하나가 아니고 양 손이었다. 시야가 까맣게 어두워졌다가, 키세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돌아오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누군가에게 가장 선명하게 기억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같은 거요. 전 몇 번이고 생각했어요. 조근조근, 키세는 몇 번이고 카사마츠의 목을 조르며 그렇게 속삭였다. 선배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하고요. 그냥 잊혀지는 것 만큼 끔찍한 것도 없잖아요. 선배 옆에 있을 수 없는 것만 해도 힘든데 좋아했던 사람이었다가, 후배였다가, 결국엔 언젠가 같은 시간을 보냈던 사람 정도로 전락하는 것 만큼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좋은 방법이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더라고요. 조급했어요. 선배가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고, 그렇게 저랑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또 줄어들고, 누군가는 선배랑 같이 있는 시간이 생기고, 그 누군가 중에 여자가 있고, 그래서 그 사람이 선배랑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제 자리는 없는 거잖아요. 제 자리가 없는 것도 억울한데, 잊혀져 버리기까지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만큼 괴로운 게 없었어요. 카사마츠는 일방적으로 키세가 쏟아내는 말을 드문드문 들으며 겨우 손을 들어 제 목을 조르고 있는 키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순간 아까 밀려들었던 위화감이 뭔지를 깨달았다. 카사마츠의 목을 누르고 있던 키세의 손에서 힘이 빠지고, 몇 번째인지 모를 호흡이 돌아온 순간 카사마츠는 이를 악물곤 제 목에 닿아 있는 키세의 손목을 있는 힘껏 밀쳐냈다. 키세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과, 카사마츠가 키세의 손목을 놓고 그 기세대로 키세를 바닥에 쓰러뜨리는 건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키세의 위에 올라 앉은 카사마츠는 저도 모르게 그대로 키세의 목에 제 손을 가져갔다. 머리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그저 몇 번이고 제 눈 앞에 찾아왔다 사라진 죽음의 공포와, 지금까지 제 모든 것을 멋대로 짓밟은 상대에 대한 분노와, 이대로 놔뒀다간 그 끔찍한 일이 또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카사마츠를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밖에서 비춰드는 이브의 달빛과 인공의 불빛이 새하얗게 방 안을 밝혔다.
그리고 카사마츠는 제가 목을 조르고 있던 키세와 눈이 마주쳤다.
막혀오는 숨에 눈가를 찌푸린 채였지만, 마주친 눈은 어둡게 웃고 있었다. 순간 카사마츠는 확, 키세의 목을 누르고 있던 손을 떼었다. 콜록, 하고 키세가 가볍게 기침을 했다가 카사마츠를 올려다 보았다.
"... 왜요?"
카사마츠는 키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일어났다. 그리고 키세가 아까 바닥에 떨어뜨린 것을 찾았다. 카사마츠의 손목에 오랫동안 채워져 있던 수갑 옆에 작은 열쇠 다발이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 중 하나가 수갑 열쇠일 거고, 다른 열쇠들 중 하나가 족쇄의 열쇠일 것이었다. 카사마츠는 키세를 돌아보지 않고 열쇠를 집어 들었다.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지만 카사마츠는 돌아보지 않은 채 맞는 열쇠를 찾았다.
"왜 멈췄어요?"
족쇄를 풀어낸 카사마츠는 뻐근한 발목을 몇 번이고 돌렸다. 희미한 빛 아래에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발목에는 선명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빠지려면 한참은 걸릴 것 같았다. 손목과 어깨도 가볍게 돌려 풀자 뻐근한 감각이 확 밀려 들었다. 아, 그래도 죽진 않았네. 카사마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직 뒤를 돌아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대로 조금만 있었으면 됐잖아요. 왜요? 저 또 이런 짓 할 지 모르는 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키세의 목소리가 점점 흐트러 졌다. 어째서예요, 선배, 네? 왜요? 고장난 인형마냥 그 말만을 반복하는 동안 점점 키세의 목소리 끝이 갈라져 갔다. 카사마츠는 제가 떨어질 뻔 한 창을 닫았다. 12월의 바람도, 바깥의 소리도 창을 닫는 순간 언제 들어왔었냐는 듯 느껴지지 않았다. 들리는 건 잔뜩 흐트러진 키세의 울음 섞인 숨소리 뿐이었다.
"왜, 선배 손에 죽게 해 주지 않았어요? 차라리 선배 손으로 벼랑 끝에서 밀어 떨어뜨려 버렸으면 좋았을텐데, 왜요!"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누구 좋으라고?"
"선배 좋으라고죠! 이대로 놔두면 나 또 이런 짓 할 거예요! 선배가 옆에 없는 건 싫으니까, 또 이렇게 끌고 와서 - ."
카사마츠는 그대로 몸을 돌려선 아직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발로 키세의 명치를 가볍게 걷어 찼다. 콜록, 하고 키세가 말을 삼키며 몸을 앞으로 숙이자, 카사마츠는 그대로 손을 들어 꾸욱 키세의 뒷머리를 눌렀다. 키세의 머리를 누르는 손 끝이 가늘게 떨렸지만, 카사마츠는 몇 번이고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태연한 척, 어른인 척.
"내가 왜 너 바라는 대로 해 줘야 되는데. 이게 네 녀석에겐 딱 좋은 벌이잖아. 난 절대로, 네가 바라는 대로 해 주진 않을 거다. 그러니까 너도 내가 힘들었던 만큼 실컷 힘들어 봐야 돼."
"지금까지도 힘들었어요, 선배가 없으니까 힘들었는데. 선배 때문에."
키세의 뒷머리를 누르던 손을 떼며 카사마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우습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떤 이유라고 해도, 키세가 제게 한 행동이 정당화 되진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상대할 마음도, 다시 볼 생각도 들지 않을텐데. 나도 미쳤나 보다, 하고 카사마츠는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상황에서 똑바로 마주 볼 정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카사마츠는 다시 한 번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키세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양손을 들어서는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양 뺨을 때렸다. 그리고 그대로 키세의 뺨을 감싸쥐었다. 눈이 마주쳤다. 카사마츠는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잔뜩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키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끝내 무언가가 깨어져 나갔다. 카사마츠의 손에 뺨을 기대며 키세는 어린아이처럼 오열했다. 선배,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좋아해요, 싫어하지 말아요. 제 손바닥을 적시는 물기에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카사마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손을 떼어 키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다음편으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