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키세는 침대에 걸터 앉아 하염없이 핸드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 분 일 분 시간이 바뀌는 것을 바라보며 키세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 간다고 생각했다. 창 밖에서 희미하게 경적음이 들렸다. 이 시간에 매너없긴. 키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통화 버튼을 꾹꾹, 두 번 눌렀다. 신호가 갔다. 그리고 부재중 음성으로 넘어갔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키세는 다시 액정의 시간을 바라보았다. 새벽 1시 34분.
계절은 여름과 가을을 지나 겨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1월이었다.
지난 여름은 키세와 카사마츠, 둘 다 서로의 생일을 챙겨주지 못했다. 키세는 한여름에 오키나와로 로케를 갔고, 거기서 촬영 스탭들에게 선물을 받았다. 웃으며 받았지만 신경은 온통 핸드폰에만 가 있었다. 6월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그 때까지도 기다리던 메세지는 오지 않았다. 카사마츠의 생일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카사마츠는 취업 활동에 바빴고 그건 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입사 설명회며 면접이 이어졌다. 그런 게 없는 날엔 졸업 논문 준비였다. 대학에 들어간 다음 하던 부활동은 거의 얼굴만 내비치는 정도였다. 같은 세미나의 친구들과 모여 얘기를 하고 술을 마시는 날도 그럭저럭 줄긴 했지만 없진 않았다. 7월 29일을 사흘 정도 앞두고 키세는 카사마츠에게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전화 너머에서 카사마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메일에도 답변이 없었다. 카사마츠의 생일은 키세에겐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그 날, 카사마츠는 세미나 지도 교수와 친구들에게 조촐한 생일 축하를 받았다. 가볍게 술이 들어갔다. 열두시가 지나고 나서야 집에 돌아온 카사마츠는 한동안 버려두다시피 한 핸드폰에 잔뜩 쌓인 키세의 메일을 확인했다. 7월 29일 23시 50분에 도착한 메일에는 '선배, 생일 축하해요. 보고 직접 말하고 싶었어요.'라는, 답지 않게 짤막한 메세지가 적혀 있었다. 카사마츠는 전화를 걸까 잠깐 생각했다가, 고개를 가볍게 내젓고는 침대에 기대어 답신을 보냈다. '연락 못 해서 미안. 축하 고맙다.' 다음해에, 라고 적으려다 만 카사마츠는 그대로 메일을 보냈다. 조금 후에 답신이 돌아왔다. '요즘은 어떠심까? 잘 되어 가세요?' 카사마츠는 픽 웃으며 짤막하게 답변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졸업 논문은 어느정도 진행 됐는지. 그렇게 30분 정도 메일을 주고 받다가, 카사마츠가 먼저 '잘 자라.'라고 보냈고, 조금 지난 뒤에야 키세에게서 '쉬세요, 선배.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요.' 라는 답신이 돌아왔다.
그게, 사귀기 시작한 지 두번째 해의 서로의 생일이었다.
카사마츠에게서 먼저 연락이 온 건 얼마 전이었다. 난관 중 하나였던 내정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담담한 문장이었지만 먼저 보내왔다는 시점에서 카사마츠가 얼마나 안도하고 있는 지가 훤히 보였다. 키세는 그 문자에 축하한다고 답신을 보내며 물었다. 졸업 논문이던가, 그건요? 카사마츠에게서 거의 바로 답변이 돌아왔다. 거의 다 끝나가고 최종 제출 전에 수정만 남았다고. 문장을 조금 다듬고 결론을 지금보다 간결하게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니 얼마 남지 않았다고. 키세는 그 문장의 절반 정도만 이해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카사마츠를 묶어놓고 있던 것들이, 이제 거의 끝나간다는 사실이었다. 키세는 웃으며 답신을 보냈다.
- 잘 됐네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
카사마츠가 키세의 연락을 받은 건 12월 초였다. 학교는 겨울 방학에 들어갔고, 졸업 논문은 무사히 통과했다. 남은 건 졸업과 4월의 새 생활 뿐이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을까, 카사마츠는 올 초부터 조금 강경하게 일부러 연락을 끊다시피 했던 키세에게서 온 전화를 바로 받았다. 근 반년만이었다.
"키세?"
- ... 선배 목소리 오랜만임다.
전화 너머의 키세의 목소리도 오랜만이었다. 여름 이후로는 전화가 아니라 메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키세도 메일이라면 카사마츠가 답해주는 걸 알아서였는지 답신을 보낸 다음 바로 전화를 거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키세의 목소리를 들은 건 거의 석 달 만이었다. 카사마츠는 픽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잘 지냈냐?"
- 전혀요. 바빴슴다. .... 선배는 이제 바쁜 건 다 끝나신 검까?
"뭐... 한 숨 돌렸다."
- 잘 됐네요.
그리고 답지않게 말이 뚝 끊겼다. 카사마츠는 오랜만에 듣는 키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는 걸 깨닫고는 등받이에서 몸을 떼며 물었다.
"무슨 일 있냐?"
- 별 일 없슴다. 그냥, 선배가 보고 싶어서요.
여전했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카사마츠는 픽 웃었다. 그리고 흘끔 탁상 달력을 보았다. 한동안 스케줄이 빼곡하게 적혀있던 달력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12월 페이지를 보며 카사마츠는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 언제 시간 나냐?"
- 언제든지요. 선배가 시간 내라면, 언제든 괜찮슴다.
"일 있다며."
- 한동안 혹사 시켰으니 조정 해 달라고 하면 해 줄검다. 그 정도는 괜찮슴다.
"그럼 이번 주말쯤에 한 번 보자."
전화 너머에서 잠시 키세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네, 그럼 선배 집 앞으로 갈게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임마, 오긴 뭘 와, 됐어. 역 쯤에서 보자. 카사마츠가 그렇게 말하자 전화 너머의 키세가 약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웃음기 어린, 답지않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 조금이라도 빨리 선배 보고 싶어서 그러니까. 아홉시 쯤에 선배 집 앞으로 가면 됨까?
"열 시다, 임마."
- 늦슴다.
"아홉시에 와도 안 열어 줄거다."
- ... 열고 들어가면 되죠.
그랬지, 스페어 키. 카사마츠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냐, 그래라. 그리고 가볍게 항복 선언을 했다. 그럼 주말에 봐요, 선배. 아홉시에 딱 선배 집 문 열검다. 전화 너머에서 키세가 웃었다. 카사마츠는 '알았다, 임마.' 하고는 마주 웃곤 전화를 끊었다.
그 주 토요일, 약속한 날 약속한 시간에 정확히 카사마츠의 집 벨이 울렸다. 카사마츠는 아홉시 정각에 정확히 찾아오는 키세의 부지런함에 혀를 내둘렀다. 문을 열자, 반 년만에 보는 후배가 서 있었다. 조금 마른 게 아닌가, 카사마츠는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안색이 좋진 않았다. 오랜만에 전처럼 쇼핑이며 원온원이며 하려고 했던 마음이 키세의 다소 파리한 안색을 보자 싹 사그러들었다. 카사마츠의 표정이 약하게 굳는 걸 보곤 키세가 쓰게 웃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키세는 카사마츠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야, 키세 너 - ."
"오랜만이잖슴까. 데이트 가요."
".... 잠은 제대로 잤냐?"
"어젠 제대로 못잤슴다. 선배랑 오랜만에 데이트잖슴까."
카사마츠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앞서 걸으면서 키세는 카사마츠에게 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 것도 거부하는 것 같은 태도에 카사마츠는 미간을 좁혔다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 문은 잠그고 가야지. 툭 던지자 그제야 잡아 끌던 걸음이 뚝 멎었다. 그리고 키세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손을 놓았다. 카사마츠는 돌아가서 현관 문을 잠근 다음, 돌아와서 키세의 손을 잡았다. 잡은 손이 움찔, 하고 떨렸다. 오늘은 져 주마. 카사마츠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고, 키세는 조금 머뭇거리다 카사마츠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나란히 속도를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
그 날, 저녁까지 먹고 시간을 확인하는 카사마츠를 말끄러미 바라보던 키세가 입을 열었다.
"선배."
"응?"
카사마츠와 눈이 마주친 키세가 웃었다. 가로등을 등지고 서 있어서였을까, 카사마츠는 키세가 웃는 게 어쩐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웃고 있는 키세의 눈가가 어두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제 방 오실래요?"
".... 너 내일 일은?"
"없슴다. 다음 주 까지 한가해요."
오랜만이잖슴까, 하루 정돈 같이 있어 주세요. 카사마츠의 손을 꽉 붙잡으며 그렇게 말하는 키세의 목소리가 어쩐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착각마저 들어서였을까. 카사마츠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들어 키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세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그러지 뭐."
"... 선배가, 와 주신다고 한 검다? 제가 억지로 데리고 간 거 아님다?"
"오냐, 알겠으니까. 이상한 말 하지 말고."
키세는 그 대답을 듣고도 한동안 미동도 없다가, 잠시 후에야 카사마츠의 손을 꼭 잡고는 걸음을 옮겼다. 키세의 집에 가는 것도 오랜만이긴 했다. 여전히 정리는 대충 해 놓고 있으려나, 엉망이면 가서 좀 정리라도 해 줄까. 가는 내내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는 키세를 보며 카사마츠는 약하게 위화감을 느꼈지만, 반 년만에 보는 탓이리라 생각했다. 제 옆의 후배는 자기보다 어찌 보면 사회 생활에선 선배뻘이었다. 반 년 사이에 조금쯤 달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부분만 달라지지 않으면 되었다.
집 앞에 도착한 키세가 도어락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카사마츠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듯 문을 연 채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카사마츠는 별 생각 없이 현관 안으로 들어서서 신발을 벗었다. 등 뒤에서 키세가 들어오는 기척과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 하고 자동으로 문이 잠기는 소리도 들렸다.
"선배가, 나빠요."
밑도 끝도 없이 들려온 그 말에 카사마츠가 '뭐?'라고 되물으려 할 때였다. 뒤통수에 강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눈 앞이 새카맣게 변했다가 시야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목 뒤로 미지근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카사마츠는 발 밑이 흔들리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느끼며 겨우 고개를 돌렸다. 키세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는 건 보였지만, 그게 뭐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눈 앞이 흐렸다. 어질거리는 머리로도 겨우 파악할 수 있었던 건, 키세의 손에 들려있는 '그것'에 피가 묻어있다는 정도였다.
아마도, 자신의.
카사마츠는 물러나다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아니, 넘어지려는 것을 키세가 붙잡았다. 안돼요, 선배. 아직 소리 크게 내면. 키세가 하는 말이 멀리서 하는 것 처럼 흐릿하게 들렸다. 시야가 가물거렸다. 키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너, 대체 왜. 그렇게 말한 것이 목소리가 되어 나온 건지 아닌지도 몰랐다. 아마도 말 한 것 같았다. 희미하게, 키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가 나빠요, 라고. 그리고 이윽고 소리마저 끊겼다. 흐려지는 의식 끝에서, 카사마츠는 키세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아마도 그렇게 말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카사마츠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다음 편은 아마도.... 아마도..... 비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