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 로제의 젊은 여주인은 밖에서 누군가를 제 가문으로 데리고 오는 일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베스파뇰라 본가도 그랬지만, 신대륙에 와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다. 키엘체의 총독, 케스 키엘체를 제 비호 안에 들였을 때엔 루드비히도 잠깐 이마를 짚었다. 그나마 레놀드의 행실에 문제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마저 없었더라면 천하의 루드비히도 제법 애를 먹고도 남았을 문제였다. 그 얘길 하자 세스티나는 조금 미안한 듯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파파. 그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어요.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루드비히는 모른 척 눈을 감아 주었다. 위험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손에 넣을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키엘체의 총독은.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그건 누굽니까?"
루드비히는 한동안 자리를 비웠던 막내가 돌아오며 데리고 온 인물을 보며 눈가를 가볍게 좁혔다. 금발의 어린 소년이었다.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그 작은 몸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흉흉하기까지 했다. 성격은 다르지만 근본은 같은 마나를 다루는 막내 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루드비히의 질문에 세스티나는 조금 웃고는 대답을 미뤘다. 세스티나와 같이 나갔던 케이시스가 루드비히의 눈치를 조금 보았다가, 당주의 재촉에 비어있는 저택의 방 쪽으로 향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세스티나가 입술을 가볍게 달싹였고, 그 소리없는 단어를 알아챈 루드비히는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세스, 일은 적당히 쳐 주세요."
"괜찮아요. 오히려 그대로 놔두는 쪽이 더 위험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 위험을 끌어들일 이유도 없어요."
"'저건' 다룰 수 있을 거 같아요."
무슨 근거죠, 그건? 루드비히가 쓰게 웃으며 묻자 세스티나는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냥요. 그리고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위험할 거 같으면 도로 돌려놓죠, 뭐. 그렇게 말하곤 아마도 소년이 있을 방 쪽으로 향하는 뒷모습에 루드비히가 물었다.
"어디다 돌려 놓게요?"
"루치페르요."
뻔한 질문에 돌아오는 뻔한 답변이었다. 그렇게 대답하고 세스티나는 약하게 소리내어 웃곤 걸음을 옮겼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 한 루드비히는 소파에 걸터 앉아 이마를 짚었다. '저건' 정말로 위험할텐데. 이런 저런 의미로. 그렇다고 해서 돌려보내기엔 그건 그거대로 위험한 인물임은 틀림 없었다.
"하여간 성격이 좋아서 문제라니까요, 세스도."
그걸로 끝이었다. 루드비히는 결코 제 딸이 하는 일을 말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비록 위험할 지 언정, 그것을 손에 넣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 질 수 있다면, 그걸 말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면에 있어 루드비히는 제 막내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
폐허가 된 루치페르 성의 한 쪽에서 소년을 발견한 것은 지독한 우연이었다. 별 일이 없으면 루치페르 성에 갈 일도 없었지만, '혹여 위험요소가 남아있을 지도 모르니 한 번 다녀와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 계기였다. 한동안 바삐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한참을 지루해 하고 있던 세스티나에게는 좋은 핑곗거리였다. 언제나처럼 케이시스와 J.D를 데리곤 루치페르 성으로 향해 정원이며 회랑을 다 둘러본 세스티나가 마지막, 뒤틀린 시공의 방 앞까지 갔을 때였다. 회랑 한 쪽에 무언가가 있었다.
"별 문제 없는 것 같으니 그만.... 잠깐, 어딜 가시는 겁니까, 대체?!"
먼저 걸음을 돌리려던 케이시스가 벌써 저만치 가 있는 세스티나의 뒤를 질겁하며 쫓았다. 그리고 앞서 가는 당주의 시선 끝에 놓인 소년을 알아챈 J.D가 세스티나의 팔을 붙잡았다.
"위험합니다."
"움직이지 않으니까 괜찮아."
"모르잖습니까, 방심하고 있는 틈에 - "
"그 전에 베어 줄 거잖아?"
그러니까 잠깐 놔 봐. 세스티나가 태연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면 누구라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신경을 바짝 곤두 세우고 한 걸음 뒤에서 칼자루를 꾹 움켜 쥔 J.D를 흘끗 돌아보며 세스티나는 다시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곤 소년의 곁까지 다가간 세스티나가 몸을 숙여 소년의 코 끝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약하지만 숨이 닿았다. 세스티나는 손을 들어 가볍게 까닥여 케이시스를 불렀다. 사람의 목숨에 관해서는 그가 좀 더 정확했다. 곁에 다가 온 케이시스가 소년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갔다.
"살아 있긴 합니다만."
"만?"
석연치 않은 말 끝에 세스티나가 고개를 기울이자 케이시스는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쩐지 영 이상해서. 그렇게만 말한 케이시스는 소년을 들쳐 멨다. J.D는 뭐하냐는 표정이었지만, 세스티나는 어깨를 으쓱 하며 웃었다. 제법 오랫동안 같이 행동해 온 사이라는 건 달랐다. 말을 안해도 알아서 잘 한다니까, 라며 웃은 세스티나는 흘끗 다시 소년을 바라보았다가 입술 끝만을 끌어 올려 웃었다.
"케이, 그거 누구 같아?"
"...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걸."
"난 알 것 같은데."
누구냐는 청년 둘의 시선을 무시하며 세스티나는 소년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랜만이야, 그 쪽이랑은 정말 인연이 질기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세스티나는 루치페르 성 안을 한 번 돌아보곤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자, 자세한 건 가서 얘기해 줄게. 그 말에 소년을 업고 있던 케이시스는 한숨을 내쉬었고, J.D는 영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
소년이 눈을 뜬 것은 블랑 로제에 데리고 온 후 나흘이 지난 후였다. 세스티나는 드물게도 모든 보고를 동행했던 두 사람에게 맡겨 놓고 소년의 옆에만 있었다. 때때로 카노며 루딘이 놀러 왔다가 소년을 보고는 찜찜해 하며 나가는 것을 보고 세스티나는 쓰게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이들이라면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저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끝없이 어두운 마력이 소년의 주변에서 흉포하게 날뛰었지만, 그 뿐이었다. 다룰 줄 아는 이가 눈을 뜨지 않는 이상 그것은 어떤 해도 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세스티나가 굳이 소년의 옆에 있는 것은 아직은 마주쳐서는 안될 이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반발이 심하겠지만 그걸 잘 달래는 것도 당주의 몫이었다.
소년이 누워있는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아 책장을 넘기던 세스티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인가 소년이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세스티나는 웃었다.
"깼네."
"... 당신, 뭐지?"
아마도 기척 없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제멋대로 날뛰던 마력이 갑자기 가라앉아 버리는 것 만큼 확연히 닿는 변화는 없었다. 그런 말은 하지 않은 채, 세스티나는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야말로 묻고 싶네. 이름은?"
".... 몰라.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그리고 내가 거기에 대답해 줘야 할 이유도 없는데?"
"살려줬으니 그 정돈 물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데. 그리고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으니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조금 크게 뜨였다가 곧 가라앉았다. 흥미롭다는 빛이 맴도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세스티나는 조금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침대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소년은 언제 누워있었냐는 듯, 사뿐히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을 딛었다. 그 감각이 생소하다는 듯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가, 손을 몇 번이고 움직여 보는 소년을 지켜보고 있던 세스티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서, 이름은? 소년은 그 질문에 불쾌하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고 세스티나를 올려보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알면 알려주면 되잖아?"
"내가 왜?"
그 말에 고개를 들어 발끈하려는 소년을 보며 세스티나는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지긋이 눌렀다.
"네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가 말해줘야 할 이유도 없지. 그건 잊어버려도 좋은 이름이니까. 대신, 그렇네. 이름이 없으면 불편하니 네게 새 이름을 줄게."
지독하게 오만하고 교만했던 네 과거에 어울리는 이름을. 세스티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몬톨이 이름은 아로간츠. arroganz라고 씁니다. 독일어 여성 명사로 오만.
남자애 이름을 여성형 명사로 지은 이유는 뭐^0^.............................. 데헷.
몬톨이가 세스 아래에서 얌전히 지내게 된 이유에 대한 썰도 좀 써보고 싶은데 사실 그게 안잡혔다고..... 그렇다고...(쭈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