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편이 실패한(....) 편이라 얌전히 전연령으로 돌아갑니다. 내용은 이미 전연령 아니지만 도데모이이.
키세가 마실 것에 약을 탔던 다음부터 카사마츠는 키세가 가져오는 것에 일절 입을 대지 않았다. 첫 날은 키세도 그냥 넘어갔다. 하루 종일 고집스레 아무것도 넘기지 않은 다음 날, 키세가 카사마츠가 기대어 앉아 있는 침대가에 앉으며 물었다. 선배, 뭐 먹어야죠. 안 그러면 죽어요. 카사마츠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곁에서 키세가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카사마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어 괜스레 체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키세가 손을 뻗어 카사마츠의 뺨을 쓰다듬었다. 카사마츠는 무시하는 대신 여전히 수갑이 채워져 있는 손을 들어 키세의 손을 밀어내었다.
"선배."
키세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했다. 하지만 카사마츠는 돌아보지 않았다. 저렇게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른 뒤 한 행동 중 카사마츠의 의사를 존중한 것은 어느 하나도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엉망진창인 관계가 되어버린 걸까. 키세가 말하는 대로, 카사마츠 자신이 뭔가 잘못한 걸까.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키세가 이렇게 해도 된다는 결론은 나오질 않았다. 키세를 좋아하지만, 존중받아야 할 최소한의 사생활조차도 내던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키세에게도 결코 좋지 않다는 결론만은 변하지 않았다.
"선배, 뭐 마시지도 않으면 진짜로 죽어요."
카사마츠는 얕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눈을 감았다. 생각조차도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라면 그조차도 멈추는 게 옳은 것 같았다. 키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어긋나고 삐걱거리는 관계가 된 건지, 이걸 원래대로 돌릴 수는 있는 건지, 그런 모든 것들을 생각하는 것도 멈춘 채 그저 시간이 흐르게 놔두고 싶었다.
하지만 키세는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침대 스프링이 삐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형광등 빛이 잠깐 눈꺼풀 위를 스쳤다가 곧 스러졌다. 한참동안 바깥에서 이런저런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의식이 까마득 해 졌다 돌아오는 가운데 키세가 카사마츠의 뺨을 쥐고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카사마츠는 가늘게 눈을 떴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 지지 않은 건지, 키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키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카사마츠의 입술 틈으로 미지근한 죽을 흘려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젖히게 해서 반쯤 강제로 삼키게 했다.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제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우습고 허탈했다.
"아무것도 안 넣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좀 먹어요, 선배. 키세는 그렇게 얘기하곤 카사마츠의 뺨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카사마츠가 입을 다물자 키세는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네요, 라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카사마츠의 뺨을 감싸쥔 뒤 입술을 겹쳤다. 그렇게 몇 번이고 키세는 카사마츠에게 죽을 먹인 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등을 기대곤 주저앉았다. 카사마츠는 약기운이 돌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야 키세 쪽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어둠속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키세의 실루엣 뿐이었다.
"선배가 죽는 건 싫어요."
키세는 무릎을 끌어 안고 있었다. 처음, 키세가 카사마츠를 기절시켰던 그 때처럼. 카사마츠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키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카사마츠는 알지 못했다. 이해하지도 못했다. 좋아한다는 말은 진실일텐데, 그렇다면 왜 이러는 건지 몰랐다. 어긋날 대로 어긋나고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서, 결국은 원래의 모습조차 알아볼 수 없는 관계가 되길 바라는 걸까. 적어도 카사마츠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 이거, 풀어."
"싫어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작게 내뱉은 말에 키세는 즉각 반응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카사마츠를 바라보진 않았다. 오히려 끌어안은 무릎에 제 얼굴을 파묻을 뿐이었다. 웅크리듯 무릎에 얼굴을 묻은 키세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놓치고 싶지 않아요. 싫어요."
"안 가."
"갈 거 잖아요. 갔잖아요. 가려고 했잖아요."
카사마츠는 침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었다. 그리고 조금 몸을 틀어 키세 쪽을 바라보았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 키세의 머리에 손을 얹으려 들었다가 찰캉거리는 쇳소리에 동작을 멈추었다. 키세는 그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카사마츠는 꾹,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한참동안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키세였다. 한참을 웅크린 채 아무 말도 없던 키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카사마츠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선배, 아직도 저 좋아하심까?"
카사마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키세는 몸을 일으켜 침대를 짚었다. 어둑한 가운데 흐릿하게 키세의 얼굴이 보였다. 곧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카사마츠는 눈을 돌렸다. 키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카사마츠는 애써 무시했다. 선배, 하고 다시 한 번 키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 것 같은 목소리에 애가 타 들어가는 초조함이 뒤섞여 있었다.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듯, 키세는 몇 번이고 카사마츠를 불렀지만 카사마츠는 눈을 꽉 감았다.
"선배."
키세는 무너지듯 침대가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카사마츠는 그제야 눈을 뜨고 키세를 바라보았다. 키세도 자신도 엉망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키세. 카사마츠는 소리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시트에 얼굴을 묻은 채 키세는 몇 번이고 얘기했다. 선배, 좋아해요, 라고. 카사마츠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 키세는 집에서 나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 감각이 없는 채인 카사마츠는 얼마나 오랫동안 키세가 집을 비웠는 지 알지 못했다. 그저, 까무룩 잠들었다가 깨기를 몇 번인가 반복할 동안 사람의 기척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만이 키세가 집을 비우고 있다는 걸 증명해 주었다. 그것도 꽤나 오랫동안.
어쩌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카사마츠는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근거는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