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키카사] 일그러지다. (2)
카사마츠가 키세의 전화에 이전처럼 반응하지 않게 된 건 4학년이 되고 난 후 부터였다. 계기는 지극히 단순했다. 세미나의 담당 교수님과 면담을 하던 도중 핸드폰이 진동했다. 카사마츠는 난감한 표정으로 핸드폰의 외부 액정을 흘끗 보았고, 거기에 표시된 이름을 보곤 새어나올 뻔 한 한숨을 삼켰다.
"급한 전화면 받아도 되네, 카사마츠 군."
백발이 희끗하게 보이는 담당 교수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지만, 카사마츠는 '아닙니다.'라며 진동하는 핸드폰을 무시했다. 내내 울려대던 진동이 멎고 '부재중 전화 1통'이라는 메세지만이 남았다. 카사마츠는 핸드폰을 열었다가 전원 버튼을 꾹 눌러 핸드폰을 껐다. 면담이 끝난 다음에 전원을 켜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두 살 연하의 후배는 여전히 아이같은 면이 있었다. 단적인 예가 지금같은 때였다. 아마도 한창 촬영중이거나, 촬영하는 사이의 휴식시간 같은 때이리라. 키세는 무언가를 확인하듯 수시로 전화를 걸곤 했다. 전화의 내용은 언제나 비슷했다. 선배, 뭐 해요? 점심 먹었어요? 저요? 지금 촬영 중임다. 그리고는 카사마츠가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를 했다. 촬영장의 이야기, 같이 촬영하는 스탭의 이야기. 전화 너머에선 가끔 키세 외의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곤 했다.
키세의 대화는 일방적이었다. 카사마츠는 키세의 일방적인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이었다. 약속을 잡는 때가 아니면 카사마츠가 제 얘기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일방적으로 제 얘기를 하고, 전화를 끊기 전엔 늘 확인하곤 했다. 선배, 좋아함다. 그건 고백이 아니고 확인이었다. 카사마츠는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느꼈다. 키세는 끊임없이 카사마츠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면담이 끝나고 나서도 카사마츠가 핸드폰 전원을 켜기까진 한참이 걸렸다. 같은 세미나의 사람들과 저녁을 먹으며 연구 과제의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 졸업 논문 얘기와 함께 취업 얘기가 나왔다. 현실이었다. 눈을 돌릴 수 없는. 빠른 경우는 3학년 2학기 무렵에 이미 내정이 확정된 사람들도 있었다. 카사마츠는 그 빠른 경우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4학년 1학기 여름 쯤에는 내정 받겠지 라며 주변 사람들은 낙관적으로 얘기해 주었다. 저녁 이후론 자연스레 술이었다. 누군가 맥주잔을 비우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카사마츠는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 돼, 라고.
"아, 하지만 연애는 역시 같은 일 하는 사람끼리가 좋지."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카사마츠는 맥주잔을 입에 대려다 멈칫 했다. 여자 동기 하나가 까르륵 웃으며 받아쳤다. 하긴, 휴일도 어쩌면 안 맞을 수 있고. 무엇보다 하는 일이 전혀 다르면 완전 별세계잖아.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분명 남자친구와 전공이 달라 세미나 얘기 같은 걸 하면 서로가 무슨 얘길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서 학교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공통 화제가 없으면 말이지. 글라스 안의 얼음을 소리나게 흔들며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다른 세계. 카사마츠는 대화에 참여하는 대신 말없이 잔을 비웠다.
카사마츠가 핸드폰 전원을 켠 건 방으로 돌아온 다음이었다. 술이 어느정도 들어가 머리가 멍한 와중에 내려놓은 가방이 쓰러지면서 핸드폰이 굴러 나왔다. 그제야 카사마츠는 멍한 머리로 떠올렸다. 아, 아까 전원 꺼놨었지. 몇 번이고 손에서 미끄러지는 핸드폰을 잡아서 충전기에 꽂고 전원을 켰다. 그리고 밀려드는 메일에 카사마츠는 정신이 들었다. 부재중 전화, 부재중 메세지. 수십 통의 메일. 이름은 하나같이 같았다. 키세 료타. 어느 것을 먼저 확인해야 할 지 몰라서 잠시 망설이다가 그나마 적은 부재중 메세지를 열었다. 5분 간격으로 세 건이었다. 가장 최근은 고작해야 10분 전. 카사마츠는 핸드폰을 귀에 대었다.
- 선배, 왜 전화 꺼져 있어요? 왜 전화 안 받아요? 무슨 일 있어요? 어디 있어요? 메일 확인 했어요? 아까도 전화 안 받았잖아. 선배, 메세지 들으면 전화 해요. 기다릴 거예요. 30분 뒤까지 전화 안 오면, 나 집으로 찾아 갈 거니까.
순간, 현관에서 난폭한 벨 소리가 들렸다. 카사마츠는 퍼뜩 놀라서는 핸드폰을 닫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갔다. 잠금 장치가 잘 열리지 않았다. 카사마츠가 잠긴 문을 열지 못하는 사이,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 장치가 열렸다.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 있던 카사마츠의 몸이 문과 함께 잡아 당겨졌다. 문이 열린 틈으로 아무런 표정이 없는 키세가 보였다. 언제나 잘 손질되어 있던 머리카락이 잔뜩 흐트러 져 있었다. 카사마츠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비틀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키세는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카사마츠가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키세가 먼저 카사마츠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선배."
술기운에 멍하던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등골이 싸했다. 키세가 움켜 쥐고 있는 어깨가 부서질 듯 아팠다. 카사마츠는 미간을 찌푸렸고, 그걸 보던 키세는 어째서인지 웃었다.
"왜 화 내요?"
"... 화, 내는 거 아니다."
"술 마셨어요? 누구랑요? 그래서 전화 안 받았어요? 동기? 여자?"
카사마츠는 대답 대신 있는 힘껏 키세의 정강이를 걷어 찼다. 다른 때 같으면 아프다고 찡얼거렸을 키세였지만, 그 날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눈가를 찌푸리며 카사마츠의 어깨를 잡은 손에서 조금 힘을 뺐을 뿐이었다. 카사마츠는 제 어깨에서 키세의 손을 떨어뜨렸고, 키세는 힘없이 손을 치웠다.
".... 왜."
카사마츠는 대답 대신 뻐근하게 아파오는 어깨를 돌렸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너야말로 왜."
".... 뭐가, 말임까."
"뭣 때문에 그렇게 전화 한 거야?"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늘 이랬다. 단순한 이유였다. 늘 이렇게 단순한 이유로 키세는 전화를 걸어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길 해야 될까. 카사마츠는 한참동안을 입을 다물었고, 키세는 그런 카사마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 줄 수 있는 말은 많았지만, 그 중에 키세가 납득하고 알아들을 수 있을 말은 없다는 걸 깨닫기까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사마츠는 키세를 좋아했다.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말하는 순간 키세는 '좋아하는 데 대체 왜요.'라고 나올 게 뻔했다. 카사마츠 유키오가 알고 있는 키세 료타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렇게 말할 녀석이었다.
"키세."
움찔, 하고 키세의 어깨가 떨렸다. 바라보는 눈동자가 이상할 정도로 절박했다. 카사마츠는 숨을 들이쉬며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키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한동안은 연락 해도 제대로 못 받을 거다."
".... 왜, 요?"
"너나 나나 할 일이 있으니까."
"전 할 일 다 하고 있어요."
"그래, 하지만 난 아니야."
"무슨 할 일요? 저랑 얘기도 못 할 정도예요?"
"할 수야 있지.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면 곤란해. 넌 네 할 일을 할 수 있을 지 몰라도 난 안돼."
키세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키세는 손을 뻗어 다시 카사마츠의 어깨를 잡으려 했지만, 카사마츠는 그 손을 붙잡아 제지했다. 마주 잡은 손이 차가웠다.
"선배."
"내가 된다고 할 때 까지 찾아오지 마."
키세는 순간 숨을 멈췄다. 카사마츠는 잠시 입술을 꾹 닫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페어 키 줬던 것도, 돌려 주고."
"싫어요."
키세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카사마츠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이번 같은 일 또 생기면 곤란해."
"싫어요, 선배."
키세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마주 잡은 손이 눈에 띌 정도로 떨리는 걸 보며 카사마츠는 잠시 말을 삼켰다.
"그럼 이렇게 하자."
한참 뒤에야 카사마츠가 먼저 입을 열었다. 키세는 곧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카사마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카사마츠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내가 흔들리면 안 돼. 이건, 키세에게도 좋지 않아, 라고.
그러니까, 이 말을 하는 건 날 위해서기도 하고 키세를 위해서기도 해, 라고.
"네가 전화 하는 거, 네가 메일 보내는 거, 전부 다 답해주지 못할거야. 네가 그걸 내가 졸업할 때 까지 참아보는 걸로."
"... 그런 게 어딨어요!!"
"아예 안 받겠다던가, 아예 답장을 안하겠다는 게 아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매번 이렇게 찾아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네가 그걸 못 버티고 다시 찾아오면 그 땐 그 열쇠 돌려받는 걸로 하자."
카사마츠는 그 때 처음으로, 키세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본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눈 앞에서 부서져 내리는 걸 본 것 같은 절망어린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환영이라도 본 것 마냥.
본편(?)은 언제일 것인가. 아마 다음이나 다다음쯤. 슬슬 비번을 걸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