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키카사] 일그러지다. (1)
마음이란 건 한 쪽으로만 흐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 촬영 감독의 지시. 멀찍이서 들려오는 매니저의 통화 소리. 키세는 이젠 익숙해 질 대로 익숙해 진 소리들을 한 쪽 귀로 듣고 나머지 귀로 흘려버리며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신경은 가방 안에 들어 있을 핸드폰에 가 있었지만, 모델 일도 햇수로는 이제 두자리에 가까워 질 정도로 오랫동안 해 왔던 탓일까,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몸은 언제나처럼 반응했다.
가방 안에 있을 핸드폰이 기다리는 소식을 전해주지 않게 된 지는 일주일이 넘었다. 메일은 쉴 새 없이 왔고, 전화도 자주 왔지만 그 어느 것도 키세가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답변을 기다리며 키세는 몇 통이고 메일을 썼다. 선배, 바빠요? 잘 챙겨 먹고 지내요? 요즘 날씨 더운데, 정장 안 더워요? 보고 싶어요. 시간 언제 나요? 그 어느 것에도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일 최근 답장을 받은 게 언제였더라. 열흘 전이었던가. 메일이 돌아오자마자 키세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가고 그토록 듣고 싶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을 때, 키세는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 지 몰랐다.
- 키세? 미안, 연락 못해서.
지독하게 피곤한 목소리였다. 그렇겠지. 대학교 졸업반이란 그런 거겠지. 일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봤을 때, 졸업 논문이네 취업 활동이네, 학사 단위네, 키세에겐 연이 없는 단어가 줄줄이 이어졌다. 한참을 듣고 있던 키세가 '힘든가요?' 라고 물어봤을 때 스탭 하나가 답했다. 내정 빨리 받으면 그나마 좀 덜하지만, 졸업 논문 통과 못해서 내정 취소 되면 그건 그거대로 힘드니까. 취활도 취활이지만 제일 힘든 건 졸업 논문 아닐까, 라고.
키세가 기억하는 카사마츠는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미도리마나 아카시처럼 전교 한자릿수를 다투는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중상위권에 속하는 편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농구만큼, 카사마츠는 공부에도 노력파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카사마츠도 졸업 논문 앞에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키세에겐 모르는 세계의 일이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몇 번이고 부재중 메세지로 넘어갔고, 키세는 끊었다 다시 걸기를 반복했다.
*
키세가 카사마츠와 사귀기 시작한 것은 키세가 졸업할 때 즈음이었다. 키세는 세 번을 거절 당했다. 네 번째 고백했던 건 키세의 졸업식 전날이었다. 카사마츠는 그전처럼 대뜸 '너 어디 아프냐?'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한참동안 키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뭔가 말하려는 듯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다 닫기를 반복했다. 세 번인가, 한숨을 내쉰 카사마츠가 물었었다. '진심이냐?'라고. 그 눈동자는 진지했고, 언제나처럼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 키세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임다, 이런 걸로 선배에게 거짓말 할 이유가 없잖슴까. 키세의 대답에 카사마츠는 그렇겠지, 라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곤 난처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뭘 하면 되냐, 라고. 그게 키세의 고백에 대한 허락이라는 걸 깨닫기 까진 조금 시간이 걸렸다. 키세는 한참동안 그 말을 곱씹어 보다가 그 의미를 깨닫곤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카사마츠에게 언제나처럼 물리적으로 걷어 차였다. 걷어 차인 부분을 문지르면서도 키세는 웃었다. 간지럽지만, 오늘부터 1일이네요. 그렇게 말하고는, 또 걷어 차였다. 키세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마음이 보답받았으니 이제 서로 행복해 지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귀기 시작한 지 몇 달간은 그랬다.
카사마츠는 무뚝뚝했지만 키세의 메일에는 짧게나마 답장을 해 주는 편이었다. 키세가 졸업하고 대학 진학 대신 모델일을 택한 뒤엔 좀처럼 만날 시간이 나지 않았지만 한달에 두어번은 꼭 만났다. 같이 식사를 하고, 길거리 코트에서 원온원도 가끔 하고, 카사마츠를 끌고 키세가 옷을 골라주러 가기도 하고. 여느 연인들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데이트를 하고, 키세의 집에서 늦게까지 티비를 보다가 같이 잠들기도 했다. 카사마츠는 키세의 응석을 거의 다 받아주는 편이었고, 키세는 그런 카사마츠에게 의지하는 일이 잦았다. 로케라도 가서 못 만날 때면 늦게라도 전화를 걸어 투정을 부렸고, 카사마츠는 피곤한 목소리로도 키세의 제멋대로인 응석을 다 받아주었다. 통화의 끝은 언제나 같았다, 선배, 좋아함다. 응, 나도. 잘자요, 선배. 그래, 너도 쉬어라. 카사마츠는 단 한 번도 싫은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키세와 카사마츠의 관계는 그렇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키세는 그 관계가 계속 그렇게 유지되리라 믿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안이했다. 키세는 카사마츠의 최우선 순위가 자신이라 믿었다. 키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 관계는 카사마츠가 키세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 주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관계라는 것 쯤은. 그랬기에 '좋아한다면 날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 줘요.'라고 무의식중에 종용해 왔고, 카사마츠가 그걸 받아주었기에 그것은 '확신'이 되었다. 좋아하니까 날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 주는 거야. 날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 주지 않으면 그건 더는 좋아하지 않는거야, 라고. 그것은 자기 암시였고, 어느 순간 확신이 되었다.
카사마츠가 달라진 것은 사귀기 시작한 지 1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카사마츠가 대학교 4학년을 올라가고 한 달 정도가 지났다. 첫 변화는 전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방 로케를 끝내고 도쿄로 올라오는 밤 차에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키세가 전화를 걸었을 때, 카사마츠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씻느라 못받나보다, 하고 그대로 놔두었다. 부재중 전화 이력이 남아 있을테니 확인 하고 나면 전화를 걸어주겠지, 하고. 30분이 지났다. 전화는 오지 않았다. 키세는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부재중 메세지로 연결이 되었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고 다시 30분 정도를 기다린 다음, 키세는 세 번째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기다리는 음성이 아닌 기계음만이 들려왔다. 키세는 삐, 소리가 들리자마자 입을 열었다.
"선배, 저예요. 뭐 해요? 전화 계속 걸었는데 안 받길래. 자요? 아직 잘 시간 아니잖아요. 친구들 만나요? 시간 이렇게 늦었는데? 저 지금 도쿄 올라가요. 보고 싶어요. 전화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은 키세는 핸드폰을 꽉 쥐고 시트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외부 액정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언제쯤 거기에 '카사마츠 선배'라는 단어가 전화번호와 함께 뜰 지 몰랐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창문을 가리고 있는 차량 내 커튼 틈으로 옅게 햇빛이 비춰들기 시작했다. 근 여섯시간 반. 전화는 끝끝내 오지 않았다.
제 방에 도착하자마자 짐만 내려놓은 키세는 오늘은 스케줄 없지만 막 돌아와서 피곤할테니 푹 쉬라는 매니저의 진심어린 충고도 무시한 채 바로 방을 나섰다. 카사마츠의 자취방이 어딘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오면서 주머니 안의 스페어 키도 확인했다. 카사마츠와 키세가 사귀기 시작한 지 3개월 쯤 지났을 무렵, 방에서 자고 있는 키세를 깨우지 않고 등교한 카사마츠가 키세의 머리맡에 두고 갔던 것이었다. 나 없는 사이 나가거나 방으로 돌아갈 거면 이거 써, 라는 짧은 쪽지와 함께 놓여있던 열쇠를 키세는 그대로 제 가방 안에 챙겨 넣었었다. 그리고 카사마츠는 그걸 듣고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하나 쯤 갖고 있는 게 좋겠다, 라며 어깨를 으쓱 했을 뿐. 손 안의 미지근한 금속을 만지작 거리며 키세는 몇 번이고 숨을 골랐다. 괜찮아, 선배는 날 좋아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걸 줄 리 없잖아. 제 차의 시동을 걸고 카사마츠의 자취방 쪽으로 향하며 키세는 쉴 새 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머리가 멍했지만, 카사마츠의 방까진 어떻게든 도착한 키세는 올라가자마자 현관 벨을 눌렀다. 한 번. 대답이 없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간격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간격보다 짧았다. 키세가 스페어 키를 현관의 열쇠 구멍에 꽂으려 할 때, 안 쪽에서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
잔뜩 피곤한 목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리자마자 키세는 현관 문을 확 열어 젖히고는 현관 안으로 멋대로 들어섰다. 그리고 제 앞에 서 있는 카사마츠를 끌어 안았다. 등 뒤에서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키세?"
"선배 왜 전화 안 받았어요? 왜 연락 안 해 줬어요? 밤새 기다렸는데? 로케 가 있는 동안에도 전화 했는 데, 그 때도 안 받고. 그 때야 제가 낮에 전화 걸었으니 학교라서 못받았다고 쳐도, 어제는 밤에 걸었는데."
".... 아, 미안. 핸드폰 가방 안에 넣어놓은 채로 안 꺼내 놔서 못 들었다."
"그런 게 어딨..."
항의하는 키세의 뺨을 양 손으로 감싸 쥔 카사마츠가 키세의 고개를 조금 숙이게 만들곤 올려다 본 다음 짧게 혀를 찼다. 그제야 키세는 카사마츠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눈 밑에 희미하게 거뭇한 기가 남아 있었다. 입술이 살짝 메말라 있었다. 피곤한 건가? 키세는 잠깐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문을 열 때 들렸던 목소리도, 방금 전 들었던 목소리도 제법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차 끌고 왔냐?"
"에? 아, 네...."
카사마츠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답한 키세의 양 뺨에 가벼운 고통이 스쳤다. 카사마츠가 키세의 양 뺨을 그대로 꼬집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밤 샌 녀석이 운전 하냐? 사고 내고 싶어?"
"그치만 선배가...."
"시끄러."
양 뺨에서 손을 뗀 카사마츠는 그대로 키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잠깐만요, 선배, 신발. 키세는 황급히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카사마츠가 잡아 끄는 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키세의 팔을 잡아 원룸 안으로 들어 선 카사마츠는 침대 위로 키세를 그대로 던지듯 밀쳤다. 막 깬 듯 엉망인 시트에선 카사마츠의 체향이 났다. 키세는 몸을 일으키려다, 카사마츠가 침대가에 걸터 앉아 머리를 꾹 누르자 저항하기를 포기했다. 카사마츠는 잠시 그렇게 키세의 머리를 누르고 있다가 손을 떼어 이불을 바로 덮어 주었다.
"눈 밑 까맣다. 모델 녀석이 그게 뭐냐. 자."
"... 남 말 할 처지는 아닌 거 같슴다, 선배."
"뭐?"
키세는 일어나는 대신 손을 뻗어 카사마츠를 끌어당겼다. 야, 키세, 잠깐만. 갑작스런 기습에 끌어당겨진 카사마츠가 당황한 듯 키세를 불렀지만, 키세는 대답 대신 카사마츠를 제 품에 끌어 안았다. 품 안에서 약한 한숨이 들려왔다. 키세는 목 안으로 웃으면서도 카사마츠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진 않았다. 품 안의 체온,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사람의 흔적이 가득한 방. 선배는 날 좋아해. 키세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리없이 웃었다. 초점이 흐려졌다.
"선배, 자요..."
"... 오냐, 그래."
어쩔 수 없다는 한숨에 뒤이어 조금 망설이듯 제 등에 감겨오는 카사마츠의 손길을 느끼며, 키세는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선배가 날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선배는 날 좋아해. 그냥, 이번엔 그냥 듣지 못했던 것 뿐이야. 의식이 가물거리는 와중에도 키세는 그렇게 제게 암시를 걸듯 중얼거렸다. 선배, 나 좋아하죠? 내가 선배를 좋아하는 만큼, 선배도 날 좋아하죠? 내가, 선배에게 가장 소중하죠? 말을 한 건지, 그냥 생각한 건지는 몰랐다. 그러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추락해 가는 의식 속에서 카사마츠의 얕은 한숨을 들은 것도, 그저 착각일 뿐이었다.
답없는 애새끼 키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