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배이자 연인인 키세와 오랜만에 만나서 저녁을 먹고, 몇 번인가 찾아간 적이 있는 그의 오피스텔에서 술을 마셨다. 도심에 있는 주제에 생각보다 조용한 키세의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카사마츠가 한 일은 티비를 켜는 일이었다. 아주 가끔 불현듯 침묵이 찾아들 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게 싫어서 생긴 버릇 같은 것이었다. 방송은 그저 침묵을 깨는 도구에 불과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배 녀석은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중학교때 부터 해오던 모델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카사마츠는 그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키세가 선택한 길이라면 딱히 말릴 생각은 없었기에 그 말을 들었을 때도 '그래.'라고 답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본격적으로 모델 일을 시작하면서, 키세는 종종 엔터테인먼트 뉴스에도 얼굴을 비추곤 했다. 키세랑 같이 있을 때 그의 인터뷰 같은 게 티비에서 나오면 카사마츠는 제 옆에서 한 쪽 무릎을 끌어안고 무방비하게 술을 마시는 녀석과 브라운관 너머에서 사교용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이 동일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몇 번이고 둘을 번갈아 보곤 했다.
그 날도 카사마츠는 키세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습관적으로 티비를 틀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란히 앉아서 술을 마셨다.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엔터테인먼트 뉴스의 진행자가 '키세 료타'의 이름을 거론했다. 카사마츠는 맥주캔을 한 손에 들고 있다가 흘끗, 티비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밑에 깔린 자막에 입을 다물었다. 티비에는 눈조차 주지 않고 얘기하던 키세는 갑자기 표정이 굳은 카사마츠를 보곤 저도 티비 화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 침묵이 찾아들었다.
"... 선배?"
키세가 카사마츠를 불렀다. 카사마츠는 잠깐 대답이 없다가, 곧 담담하게 맥주를 한모금 들이켰다.
"로케라는 게 저거였냐?"
".... 네에, 뭐. - 그러니까, 저런 건 그냥 일이라서."
"알아."
티비에선 키세가 얼마 전 광고 모델로 채택된 브랜드의 여름 화보 촬영 현장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영장이며 바닷가를 배경으로 촬영했던 화보의 상대역은 잘나가는 여자 모델이었다. 밝은 목소리의 나레이션이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라고 하는 게 들렸다. 카사마츠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넘겼고, 키세는 손을 뻗어 리모콘을 잡곤 채널을 돌렸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아까같이 얘기를 이어나갔다. 카사마츠는 언제나처럼 키세의 실없는 얘기에 응해주며 캔을 비웠다.
그래, 일이지. 카사마츠는 키세가 테이블 위에 놓은 리모콘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다음은 언제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키세가 먼저 카사마츠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치고, 좋아한다고 얘기하고, 카사마츠는 그걸 어린애 응석 받아주듯 받아주었다. 제게 매달리듯 입맞추는 후배 녀석을 향한 카사마츠의 감정은 아마도 키세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욱 무거울테지만, 카사마츠는 그런 말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 날도 그랬다.
새벽에 눈이 뜨였다. 카사마츠는 물끄러미 제 옆에서 자고 있는 키세를 바라보았다. 해도 뜨지 않아 아직 한참 어두운 방 안에서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한참동안 잠든 키세를 바라보던 카사마츠는 홀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을 켜지 않아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조용히 문을 연 카사마츠는 주방 쪽으로 향했다. 좀처럼 요리를 해 먹지 않는 키세를 걷어차며 좀 만들어 먹으라는 뜻으로 사 주었던 조리용 칼은 사 주었던 때의 예리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받은 뒤에 거의 쓰지 않았겠지. 카사마츠는 칼을 집어 들었다. 적당한 무게의 칼을 가만히 쥐어보았던 카사마츠는 나왔던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수험 공부를 하던 때에 모리야마와 실없이 나누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왜 연인들이 동반 자살을 하는 걸까, 자못 심각하게 얘기하던 모리야마의 말에 헛소리 그만 해라, 라고 받아쳤던 적이 있었다. 난 심각하다고, 라며 카사마츠가 보던 수험서를 뺏은 모리야마를 바라보던 카사마츠가 한숨을 내쉬곤 툭, 던진 적이 있었다. 마음이 변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더라. 모리야마는 그 말에 자못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카사마츠는 그런 모리야마의 손에서 제 수험서를 도로 뺏어왔던 적이 있었다.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키세의 옆에 있는 게, 어느 순간 제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좀처럼 깰 기미가 보이지 않는 키세의 이마에, 눈꺼풀 위에, 입술에 가볍게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뗀 카사마츠는 제 손에 들려있던 칼을 올렸다가 무방비하게 드러나 있는 목 위로 떨어뜨렸다. 몇 번이고. 미지근하고 비릿한 액체가 뺨이며 손에 질척하게 묻어나는 걸 보면서 카사마츠는 이걸로 됐어, 라고 중얼거렸다.
"라는 꿈을 꿨다."
키세는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한 걸 겨우 참고는 콜록였다. 맞은 편에서 '괜찮냐?'라며 컵을 내려놓은 카사마츠를 보며 키세는 고개를 내저었다.
".... 선배."
"실제로 그럴 리가 없잖냐."
지독하게 담담하게 말한 카사마츠는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곤 말없이 몇 번인가 씹은 뒤 커피와 함께 넘겼다. 키세는 '그렇죠?'라며 애써 웃으며 내려놓았던 커피잔을 들었다. 그리곤 마시려다가 손을 멈추곤 다시 카사마츠를 바라보았다.
".... 뭘 그렇게 보냐?"
"저 지금 생각한 건데요."
뭔데, 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사마츠를 마주 바라보며 키세가 웃었다.
"저 그만큼 선배한테 사랑받고 있단 거네요."
"닥치고 먹기나 해."
테이블 아래에서 카사마츠가 키세의 다리를 걷어 찼다. 아파요, 라며 엄살을 부리면서도 키세는 웃었다. 그거 알아요, 선배? 키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 거의 매일 그런 꿈을 꿔요,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