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P] 쪽글 (7) (아라햄코←테오, 2주차 개별엔딩 네타)
2주차 개별엔딩 본 기념 + 내일 발표용 PPT 작성 끝난 기념...
아 죽을것 같아 힘들어...........
아주 긴 꿈이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그 꿈이 무척 행복하면서도 가슴아픈 것이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오랜 꿈에서 눈을 떴을 때, 바깥에는 벚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3월이었다.
"여, 신지. 이제 깼냐."
아라가키의 의식 회복 소식에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온 것은 사나다였다. 산소 호흡기를 비롯한 거추장스러운 기계들이 사라진 병실은 휑할 정도로 넓었다.
"졸업식에는 어찌어찌 맞췄잖아. 같이 졸업하고 싶었냐?"
"바보같은 소릴."
"잘 알고 있네. 넌 일 년 더 학교 있다 와라."
사나다의 농담 어린 말에 아라가키는 피식, 웃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언제나의 집회 장소에서 다른 녀석들과 한바탕 싸움이 붙었고 그 와중에 누군가가 총을 쏘았고 그걸 맞았다는 것 같았다. '같았다'인 이유는, 아라가키 본인의 기억도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심장 가까이에 총탄이 박혔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은 총탄을 대신해서 맞아 준 것이 있어서였다. 사나다가 일방적으로 졸업식 날짜를 통보해 주고 나간 다음, 아라가키는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움직이지 않는 부서진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의사에게 듣기로는 치명상을 입힐 뻔했던 총알이 시계에 맞으면서 기적적으로 심장에는 이상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출혈량이 심했던데다가 두 발의 총상 중 한 발도 만만치 않게 생명에 위협을 끼칠만한 곳에 맞았었다고. 근 반년 가까이 잠들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길고 긴 꿈이 다시 떠올랐다. 안개라도 낀 것 처럼, 그저 어렴풋한 '느낌'만이 여운처럼 남는 꿈. 잊어서는 안될 소중한 '누군가'의 꿈.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꿈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사나다가 나가면서 툭 던졌던 말이 생각났다. 졸업식은 3월 5일이니까 그 날은 꼭 와라. 나도 미츠루도 졸업이니까. 네녀석의 졸업 축하 정도는 들어야겠다, 반년 동안 사람 속을 썩인 벌이야, 라고. 3월 5일, 이라는 날짜를 말하던 순간 사나다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 졌던 것도 생각났다. 3월 5일, 졸업식, 이 두 단어를 말하면서 무언가 걸리는 표정을 했던 것도.
그리고, 그 오랜 꿈 속에서 그 단어들을 들었던 것 같은 기분도.
*
3월 5일 아침이었다. 졸업식엔 느지막히 얼굴만 비출 요량으로 준비하고 있던 아라가키의 병실 문이 열렸다. 소리 없이 열린 문은 역시 소리없이 닫혔다. 병실의 공기가 순간 멎은 것 같았다.
"아라가키 신지로 님이시지요."
등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아라가키는 반사적으로 긴장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문가에 서 있는 것은 생전 처음 보는 남자였다. 푸른 빛의 제복 같은 옷, 색이 옅은 머리카락, 이질적인 눈동자. 전체적으로 단정한 느낌의 청년은, 아라가키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입술이 소리없이 달싹여 무언가 말을 자아냈지만 아라가키는 그 말이 무엇인지 몰랐다.
"뭐야, 넌."
"모시러 왔습니다."
"... 아키나 키리죠가 보냈냐?"
"아니오. - 당신이 잊어서는 안 될 분께 모셔드리기 위해 온 겁니다."
"잊어서는 안 될 분?"
청년의 말에 아라가키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꿈, 가슴 한 구석을 계속해서 짓누르고 있던 무게감.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은 청년의 눈동자에 약한 파문이 일었다. 고통, 슬픔, 안타까움, 애틋함. 그 감정의 파문이 낯설지 않다는 사실에 아라가키는 당황했다. 분명 자신이 매번 꿈 속에서 보고 있는 그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면 일어나는 감정과도 닮은.
"...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청년은 성큼 다가와서는 아라가키의 손을 잡아 끌었다. 팔을 잡고 있는 손의 힘에 손 끝의 감각이 일순 마비될 정도였지만, 청년은 곧 조금 힘을 빼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청년은 병실 문을 열며 아라가키를 잡아 끌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그가 던진 말에, 아라가키는 다시 한 번 미간을 찌푸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당신도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대체 무엇을?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월광관 학원의 정문은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아찔할 정도였다. 내내 아라가키를 잡아 끌던 청년은 정문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가, 곧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졸업식이 진행되고 있는 강당으로 향하는가 싶었지만 청년은 강당을 그냥 지나쳐 갔다. 멀찍이서 재학생 송사의 끝맺음이 들렸다. 학교 안으로 들어선 청년은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라가키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럼, 전 이만."
"이봐, 잠깐."
걸음을 돌리려는 청년을 불러세우자,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돌아보았다. 바라보는 눈동자에 배인 감정이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어서, 아라가키는 말을 삼켰지만 참고는 말을 꺼냈다.
"너도 알고 있는 거냐, 그...."
"알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그 분이 어떤 존재인지, 그 분에게 있어서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나는 모르는 사실인데도?"
단아한 청년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은은하게 억누르고 있는 그 감정은 잔잔한 분노였다.
"당신들은 기억해 내야만 합니다."
그 뿐이었다. 청년은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걸음을 돌렸다. 청년이 모퉁이를 꺾어 지나칠 때 쯤, 문득 아라가키의 귀에 키리죠의 졸업생 답사가 들려왔다. '아버지의 병사'. 그 말에서 답사가 멎었다. 청년이 사라진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던 아라가키는 문득 고개를 들어 계단을 올려다 보았다. 정확히는 '옥상'을.
- 선배, 우리 약속했어요.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선배들의 졸업식 날 학교 옥상에서 만나기로.
언제 들은 얘기였지. '그 때'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만은 선명했다.
- 전부, 다 끝났어요. 타르타로스도, 뉵스도, 섀도 타임도 전부 사라졌어요. 선배가 원하던 대로.
목소리가 떠오르면서 그 모습도 떠올랐다. 함께 보냈던 시간, 그 추억들, 그리고 그 마음도.
- 그러니까, 선배. 선배도 그 날 와 주세요. 꼭, 약속이예요.
미츠루의 송사는 완전히 멎어있었다. 아라가키는 고개를 들어 계단 위를 올려다 보았다가, 걸음을 떼었다. 심장이 뛰었다. 두 단씩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동안 모든 것이 기억났다. 왜 다 잊고 있었던 걸까. 잠들어 있던 동안 쭉, 혼자서 그 모든것을 짊어지고 있었을 그 작고 약한 녀석의 일을. 다시 만나면, 잊고 있었어서 미안하다고, 여전히 네가 소중하다고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옥상이 가까워 져 감에 따라 숨이 막혀왔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탓에 체력이 떨어져 있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옥상 문을 열었을 때, '그녀'가 보였다.
*
이걸로 다 된 걸까요. 테오도어는 학교 옥상 쪽을 올려다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원하지만 않았더라면,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임에도 당신을 잊고 있었던 저 사람을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텐데.
저는 언제까지고 얻을 수 없는 당신의 마지막을.
희미하게 누군가의 오열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테오도어는 눈을 감았다. 감긴 눈 위로, 뺨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그 날'을 떠올렸다. 그녀의 방에서 느꼈던 햇살을. 그 때 들었던 말들과, 목소리와, 닿았던 온기를.
테오도어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옥상 쪽을 올려다 보았다. 하염없이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은 눈이 아플 정도로 맑았다.
당신의 마지막은 제 것이 아니었지만, 당신이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잡는 손은 저의 것이기를.
테오도어는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뺨을 타고 한줄기 물기가 흘러내렸다.
+ 3주차 시망 시발.